기독교 선교 역사


1.  최초 선교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낙후된 나라로 알려진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다. 서쪽으로는 타이와 북쪽으로는 라오스, 그리고 동쪽으로는 베트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이 나라의 면적에 있어서는 아주 작은 나라이기는 하지만 우리를 황홀하게 만들며 주변의 강대국이 버티는 가운데서도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크메르인이라는 단일 혈통의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일찍이 인도문화를 받아들여 이웃인 타이보다도 앞서 있었다. 주님의 90% 정도가 동남아시아의 지배적인 종교인 테라바다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그러나 캄보디아는 한국과 달리 수도를 앙코르지역에서 남으로 철수한 후인 16세기경에 이미 기독교문화가 침투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왕이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 선교사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화를 접할 수 있기도 하였으나 프랑스로서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기독교 문화를 캄보디아에 접목하는데 소홀히 한 감이 없지 않다. 문호가 활짝 열려있는 상태인데도 캄보디아가 가진 특이한 불교와 힌두교 그리고 에니미즘과 샤머니즘으로 인해서인지 외래 종교의 침투는 아주 늦었다. 마르틴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인 1517년에 문을 두드렸으며, 개신교는 1923년에야 그곳에 최초로 선교사가 입국하게 되었다. 그 후 캄보디아의 많은 정변과 아울러 가톨릭이나 개신교 모두 부침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카톨릭 선교

1517년에 최초로 캄보디아에 가톨릭의 영향이 시도되었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으며, 1555년에는 당시의 국왕이던 Bat Ang Chan이 가톨릭 선교사인 가스파르 드 크루즈(Gaspar de Cruz)를 수도인 롱엑에 초청하였으며, 그 선교사가 죽은 후 왕실 가족 중 한 면이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한다.

1574년 에는 Sylvestre Azevedo 신부와 도미니크회 포르투갈 선교사가 캄보디아에 와서 22년간 머물렀으며 이들에 의해서 최초로 기독교 신자가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후 이곳에는 베트남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오기도 하였다. 베트남은 프랑스 가톨릭교회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나라 중의 하나이다.

17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일본인 가톨릭 신자가 캄보디아에 이주하여 폰헤아 루(Ponhea Lu)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3.  개신교 선교

최초의 선교사 입국과 초기선교(1923년~1950년)

5세기경의 네스토리안이 이 지역에 들어온 이래 가톨릭이 아닌 개신교로서 최초의 직접 선교를 위해서 1923년에 입국한 선교사는 미국의 아더 헤먼드(Arthur L. Hammond)목사와 그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C&MA(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의 소속으로서 사이공으로부터 프놈펜에 도착하여 성경의 크메르어 번역 작업을 착수하였다. 같은 해 같은 선교단체의 목사였던 데이비드 엘리슨(David Ellison)이 부인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입국하여 처음에는 바탐방에서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성서학교를 열었으나 후에 프놈펜으로 장소를 옮겼다.

Arthur Hammond에 의해 1934년 신약성경 번역 완료, 1940년 전 성경 번역 완료, 1954년 영국과 해외성서협회에서 주관하여 크메르어성경 발간하였으며, Hammond 목사와 Ellison은 1923년부터 1965년 사이에 거의 2천명 가량을 기독교로 전향시켰다.

박해와 반전의 시기(1953년~1975년)

1953년 시아누크 국왕의 십자군행진으로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하였다. 그 때 시아누크국왕은 Hammond 목사가 번역한 크메르어 성경 한 부를 증정 받았는데 이 자리에서 개신교도의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고 하였으나 공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았다

1965년에는 약 2천명의 기독교신자가 있었으나, 시아누크공은 월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암살당한 것은 미국 CIA의 소행으로 생각하고 1963년에 미국과의 단교를 거쳐 1965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모두가 스파이라고 인정하고 비자의 재발급을 거부하고 모든 선교사들을 추방하였다

1969년에 들어와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1966년 선거에서 친미파인 론 놀 장군이 이끄는 세력이 승리함으로써 CMA선교사들이 다시 캄보디아로 귀환하였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상당히 발전하고 있었으며, 도시에서는 기독교의 복음이 급속하게 거리로 퍼져나가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농촌에서는 공산당의 반란으로 아주 평화스런 생활에 혼란을 가져다 주고 있었다.

1970년대에는 OMF(Oversea Missionary Fellowship)라는 기독교 선교단체가 캄보디아로 들어와 CMA와 함께 사역하게 되었으며, 따끄마우의 성경학교가 시작되었다

1972년에 월드 비젼의 Stan Mooneyham 회장이 동남아 여행 중에 캄보디아가 처한 고통을 알고 베트남을 출발하여 캄보디아로 가는 첫 여행의 가방에는 의약품이 가득 들어 있었으며, 크메르복음교회(Khmer Evangelical Church)에서 전쟁으로 인한 피난민을 치료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을 전하였다.

1974년에 CMA는 대략적으로 프놈펜에는 약 1만명의 크리스쳔이 있을 것으로 추산하였다. 이 무렵 한국인 임세종씨가 사이공에서 태권도 사범을 하다가 프놈펜으로 옮겨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지옥의 날이 시작되다(1975년)

1975년 4월17일 폴 포트의 공산군이 프놈펜에 입성하면서 “우리는 여러분과 대화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정복자로서 왔다”라고 하면서 지옥이 시작되는 날이라고 천명하였다. 폴 포트의 테러 정권은 대게 크리스쳔이나 승려, 정치인, 지식인과 교사 그리고 누구든지 전 정부에 협조한 인사들에 대한 청소를 시작하였다. 종교적인 시설물인 사찰과 교회는 파괴되어 강이나 호수에 버려졌으며, 화폐도 폐지되었고 도서관의 책들은 찢어져 담배를 마는 종이로 사용되었다. Ellison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교계 지도자나 목사들 33명중 27명이 폴 포트 치하에서 강제로 긂주림으로 인하여 순교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약 90%의 개신교도들이 폴 포트의 추종자들에게 순교 당하였고, 종교적인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되었다. 프놈펜의 카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도 폐쇄되었고, 수 천명의 난민들이 태국국경으로 떠났다.


헹삼린과 훈센 치아심의 시대가 오다(1979년)

1979년 베트남의 침공은 살육의 공포를 멈추게는 했으나 또 다른 복잡한 정치 적인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철저한 통제로 인해 3년 반이 지나서야 캄보디아 내에 교회가 살아 있다는 소식이 처음으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1) 1979년 1월 7일 KPR(Kampuchean People's Republic)이라고 이름 붙여진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의 도움을 받아 폴 포트 정권을 몰아냈다. 크메르 루즈의 학정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지만 종교적 신념이나 표현은 극도로 제한되었다. 많은 신자들이 태국 국경의 난민촌으로 피신하였고 또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난민촌에서 기독교인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다.

약2백명의 살아 남은 캄보디아 기독교인들이 프놈펜의 옛시장(Old Market)과 칸달주의 Takhmau에서 함께 모였다. 지하교회가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이 교회들은 주로 젊은이들과 훈련 받지 못한 사역자들에 의해 이끌어졌다.

WCC의 Jean Clavaud 목사에 의해 캄보디아 성경책과 TEE(Theological Education by Extension) 교재들이 밀반입되었고 비밀리에 프놈펜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여졌다

C&MA와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는 태국국경의 여러 난민촌 내에서 TEE과정을 활발하게 가르쳤다. FEBC의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도 캄보디아 내외의 캄보디아 교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2) 1980년 몇 개의 기독교 NGO들이 다시 일하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그들의 활동은 긴급구호와 개발 사역에만 참여하도록 극히 제한되었다.

3) 1982년 6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4) 1980-88 이 당시 기독교는 여전히 불법이었고 교회는 찢겨진 채 다시 모을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였다.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모일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많은 크리스찬들이 태국으로 빠져나갔다.

5) 베트남군들이 국제 여론에 밀려 캄보디아로부터 철수하였고 몇몇 기독교인들이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를 정부에 제출하였다. 1990년이 되어 첫 번째 공식적으로 허가받은 예배가 4월14 일 부활주일 예배로 프놈펜에서 개신교, 카톨릭을 포함하여 1,500명이 모여 에큐메니칼 예배로 드려졌다.


4.   현재의 기독교 상황

(1) 1990년 4월 9일 정부가 기독교회를 인정하였고 크메르루즈 치하에서 비극적인 박해를 받았던 사실도 시인하였다. 4월9일 마침내 정부가 현존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교회가 공식적으로 부활절기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2) 1991년 캄보디아의 기독교인들이 은신처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3) 1992년 기독교 NGO들이 쇄도하기 시작하였고 교회들이 다시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복음전도는 여전히 법적으로 불법이었지만 시도되었다.

YWAM (Youth With A Mission) 의 Peter Davi, 그리고 Uno Seila가 태국의 제2난민촌에서 제자훈련과정(Discipleship Training Course)을 시작하였다.

Taing Vek Huong 목사(순교한 탕치륵 목사의 동생, 현 캄보디아 CCC 대표)가 태국의 제2난민촌과 제B난민촌에서 제자훈련센타(Discipleship Training Center)를 시작하였다. Wilfried Losch 와 Barnabas Mam 목사가 난민들을 재정착촌으로 옮기는 사역이 시작되어 난민촌이 폐쇄되기 직전부터 SOW(School of Worker) 의 첫째 과정을 시작하였다

4월에 CMC(Cambodia Ministries for Christ)의 Daniel Lam 과 Aaron Setan Lee가 프놈펜 성경학교를 (Phnom Penh Bible School) 설립하였다.

C&MA 의 Bounsoueth Lou가 프놈펜과 지방에서 매주 가르치는 TEE과정을 개설하였다.

UN 의 평화유지군(PKO)이 소요지역의 무장해제와 자유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주둔하였다.

(4) 1993년 5월의 총선거가 성공적으로 마쳤다. 9월 Nordom Sihanouk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새헌법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국가 종교인 불교에 더하여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주요종교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교단주의가 다시 부활되었고 각종 선교단체와 기독교 NGO들이 쇄도하였다.

KBF(Khmer Baptist Federation)의 Tuon Kakada와 CSI(Cooperative Service International)의 Bruce Carlton이 프놈펜의 루시케오에서 KBF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0월 새번역 크메르어 신약성경번역이 시작한지 20년만에 공식적으로 헌정식을 갖고 탄생하였다.

캄보디아 성서공회(Cambodia Bible Society)와 Samoeun Intal의 FEBC(극동방송 : Far East Brodcast Center)사무실과 방송국이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설립되었다. 국내 방송요원들이 채용되었고 라디오 지도자 훈련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5) 1994년 3월 첫 번째 민족목회자 대회가 WVI(World Vision International)의 후원으로 프놈펜에서 개최되었다. 전국대부분의 지역에서 17 개 교단으로부터 317명의 현지 목회자들이 참석하였다.

1994년 초 ERME( Encouragement Resources Ministry)의 Barnabas Mam목사와 EHC(Every Home for Christ) 의 Paulerk Sar목사가 프놈펜 과 주요지방에서 SPMC(School of Practice Ministries Cambodia)를 시작하였다.

11월 CCC(Campus Crusade for Christ)의 Taing Vek Huong와 Khieu Van Long목사가 CCC 새생명 신학교(CCC New Life Bible School) 를 설립하였다.

그런가 하면 11월에 God Bless Cambodia 주제로 미국인 Mike Evans 가 신유집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3만명이 치유받고자 가산을 처분하여 프놈펜으로 몰려왔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자 집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내무부는 집회를 중지시키고 Evans를 출국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6) 1995년 KFC (Kampuchea For Christ) 의 Aaron Setan Lee, 그리고 Chhit Paul Arun이 바탐방 신학교를 시작하였다. AOG(Assemblies of God Cambodia)의 Randy Dorsey목사가 프놈펜에서 캄보디아 신학교 (Cambodia Bible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AOC (Asian Outreach Cambodia)의 Eric Fung과 Selwyn Jackson이 프놈펜에서 GCI (Great Commision Institute)를 설립하였다.

4월에는 종교부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5개의 조직이 구성되었다.

1) 카톨릭,

2) 개신교- Cambodia Christian Federation(CCF), The Evangel- -ical Fellowship of Cambodia(EFC), The Cambodia Christian Evangelical Alliance(CCEA),

3) 안식교 (참고: 위 단체 이외에 여호와 증인, New Apostolic Church, 그리고 몰몬교도 조직되었다.)

그리고 10월에 종교부는 위 5개 단체들로 캄보디아 기독교 협의회를 만들라고 명령하 였다.

(7) 1996년 HBL (Home Bible League Internation)의 Rudy Manzono 가 프놈펜에서 교회개척훈련(Church Planters's Training)을 시작하였다.

(8) 1997년 새로운 신구약성서가 발간되었다.

출처 : Lover Khmer http://cafe.daum.net/LoveKhmer/OKDE/2  글쓴이 : 송신용

캄보디아 지도 - 출처 : Google Map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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