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삼자교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김병태 교수]
 
들어가는 말
주어진 제목은 “중국 삼자교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제목이다. 그러나 중국 삼자교회에 대한 관심은 현재로서 삼자교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라는 시각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필자로서는 사실 이러한 관심의 배경 자체가 부담스럽다. 중국의 교회인 삼자교회를 중국교회의 역사적 맥락과 현실 속에서 파악하지 않고 한국교회의 요구를 강요하여 나오는 소위 이상적 교회형태를 전제한 후, 중국 삼자교회를 심판받아야 할 교회로 성급하게 파악하기 때문이다. 선교역사에서 토착교회의 중요성은 일찍부터 논구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삼자교회가 중국의 선교역사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자는 것이 이러한 제목을 낸 의도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중국 근대사에 대한 기술을 통해 역사적 이해를 돕고 난 후에 삼자교회의 출현배경과 존재방식을 살펴야 할 것이다. 필자가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전에 사회역사적 맥락 특히 아시아에서는 종교적 배경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현대 중국의 경우에는 정치경제적 요인이 좀 더 강하지만 여전히 정통적 종교배경이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고 앞으로 그것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중국 삼자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중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배경과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상황 속의 기독교라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중국의 기독교가 여타의 종교와 함께 중국정부의 종교정책 범위 안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이것은 국가의 통치영역 뿐 아니라, 대학의 학문적 분류, 사회적 통념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19-20세기 서방제국주의의 침탈을 비판하고 자국교회를 건설하려는 과정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20세기 세계교회의 선교학적 고민 또는 발전과 연결되어 있다. 더구나 중구교회는 엄청난 기독교 부흥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따라서 중국 삼자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역사와 정치경제적 맥락, 그리고 종교학적, 선교학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먼저 중국 삼자교회르 위한 변명이 되었다. 그러나 종교가 사회의 종속변수일 뿐 아니라, 특히 기독교가 사회변형을 도모하는 선교적 종교임을 고려할 때, 삼자교회가 중국의 현 상황과 미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마련해 갈 것인가를 추정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성실한 자매교회로서 중국기독교의 선교적 성공을 위해 도울 길을 찾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되돌아 보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Ⅰ. 중국 근대사 이후 나타난 두 차례의 국가개방

1. 19세기의 수동적 개방과 민족주의의 발흥

康乾盛世(1661-1795)가 끝나고 嘉慶시기(1796-1829)에 이르러 중국은 국력이 현저하게 쇠락하고 있엇던 반면에, 서방에서는 스페인과 포르투칼, 그리고 네델란드를 거쳐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의 바탕 위에서 영국의 식민주의 정책이 힘을 얻고 있었고, 영국은 동아시아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1816년에 인도를 완전 지배했고, 1819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했으며, 1824년에 미얀마 일부를 점령하고, 1938년에는 아프카느시탄을 침략했다.

산업혁명을 발전시킨 영국이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처로서의 중국에 공식적으로 진입하게 된 것은 아편전쟁의 결과 체결된 남경조약을 통해서였다. 1842년의 南京조약, 1843년의 黃捕조약, 1844년의 望廈조약 등 일련의 불평등조약을 통해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 그리고 그 밖의 서구 열강들이 물밀듯이 중국에 발을 들여놓았다. 결국 중국은 서남해안의 5개 항구로부터 시작해서 長江유역, 그리고 전국의 국토를 속수무책으로 서구열강의 공격 앞에 내놓고 말았다. 

서구 열강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토를 점령하고, 정치적 특권을 가졌으며, 경제적 약탈을 자행하였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국가는 중국의 세관과 대외무역, 교통운수를 통제하였으며, 석탄과 철광, 재정금융을 장악하였다. 소농중심의 농촌경제는 피폐해졌고, 토지의 집중이 가속화되었고, 제국에 의해 점유된 토지 역시 급격히 증대하였다. 19세기 후반기에 제한적으로 발전한 중국의 산업은 그 역량도 약하였지만 종속성을 면치 못하였고, 제국주의와 중화민족 사이의 주요모순을 극복할 역량을 갖추지 못하였다. 

태평천국혁명(1851-1864)은 반제반봉건의 기치 아래 기왕의 농민봉기가 집약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태평천국혁명은 봉건통치를 크게 동요시킨 측면은 있지만, 강고한 전통사상을 모너뜨릴 지도이념이 미흡하였고, 보수적이었으며, 핵심지도부가 분열하는 등 내부 역량이 약하였다. 오히려 태평천국의 진압에 나섰던 중국번, 리홍장 등의 봉건세력을 自强운동에 나서게 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제 19세기 후반 중국은 군사공업과 민용공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자각에서 발전하여 정체제도의 개혁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기술을 일으켜 洋弟를 제압하고자 했던 洋務運動, 그리고 일정부분 자본주의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던 變法維新운동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개량운동은 西太后로 대표되는 보수파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다시 한 번 혁명적 민족운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의화단운동(1899-1900)은 ‘扶淸滅洋'의 기치를 내걸고사회하층민중이 주체가 되어 일으킨 반제애국주의 일대 운동이다. 이것은 결국 서태후 정권의 배신과 8개국 연합군을 대륙 안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고 말았지만, 극단적인 배외주의 색채로 인하여 일정부분 紳上層과 보수관료를 집결시키리 수 있었고, 20세기 초의 민족주의 정서를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손문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운동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열강의 기득권과 타협하는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하였다. 

2. 20세기말의 개혁개방정책과 사회주의 정권의 과제 변화

신해혁명은 半봉건 半식민지의 중국이 못다 이룬 중국 현대사의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 인민이 투쟁한 20세기 해방역사의 서막이었다. 철저한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임무는 이제 공산주의 지도역량을 중심으로 하는 신흥 무신계급에게 주어졌다. 1915년 陣獨秀의 『 靑年雜誌』로 비롯된 신문화운동은 과학과 민주의 기치 아래 민족개조운동으로부터 反帝인민민주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차 세계대전, 러시아혁명 등의 영향 아래, 중국공산당이 성립(1921)되고 험난한 내전을 거치면서 항일전쟁에 승리하고 군벌과 국민당을 물리친 후 신중국이 탄생하였다. 

신중국은 노동자계급이 지도하고, 工農聯盟을 기초로 하여 모든 계급 및 민족과 단결하는 인민민주독재국가이며,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기초한 인민대표의 정부를 구성한다고 규정되었다. 그와 같은 기초 위에서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질서를 회복하고 토지개혁이 실시되었으며 기업관리의 민주화를 통해 농공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또한 여성해방정책이 실시되고, 지식인의 사상개조운동이 일어나는 등 사회문화개혁운동을 진행시켰다. 그리하여 1956년 모택동은 사회주의로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2차 5개년 계획(1958-1962)시기에 생산력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당지도부는 급진적 군중노선에 의지하여 자본주의 노선과의 계속적인 투쟁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인민민주주의를 희생시키면서 등장한 대약진운동은 여지없이 실패하였다. 자원낭비, 생산감소, 생산의지의 상실로 이어졌고, 3천만 명의 인민이 기아로 사망하였다. 그리하여 객관적 수준에 대한 정직한 평가와 경제적 효율성을 주장한 유기소, 등소평 등의 수정노선이 등장하였다. 그 후 10년의 동란기간을 거쳐 실사구시 노선은 등소평의 복권과 함께 개재되었다. 1978년의 당 제 11기 3중전회는 개혁개방과 경제활성화를 강조했고,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문호개방을 선택하였다. 

생산력 수준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규정되었고, 생산력 발전을 저해하는 생산관계와 상부구조의 개혁으로 관리방식, 활동방식, 사상방식을 개혁하고,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교류하여 선진기술과 자금, 합리적 경영을 도입하고 시장을 개척하는 개방정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과거 청조시기에 전통 중화사상 때문에 서방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근대화가 늦어졌던 과오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 위해서, 단호하게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와 경제, 과학, 기술교류를 진행하고, 이로써 생산력 수준이 충분히 발전된 자본주의 단계의 획득을 당면목표로 삼게 된 것이다. 

1979년 국무원은 ‘경제특구’의 건설을 결정하고, 중외합작기업법을 발표하였으며, 외국 투자자를 받아들였다. 1984년에는 장강유역과 발해만지역의 연해안을 개방했다. 특히 천안문사태를 극복한 1992 초 등소평의 南巡講話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가 채택되면서 개혁개방은 가속화되어 한국과도 수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1992년의 당 14차대회, 2002년의 당 16차대회를 통해서 등장한 강택민, 호금도는 여전히 생산력의 발전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나, 동시에 사회주의 문화건설, 화목한 사회건설 등의 구호를 통해 전 인민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이것은 빈부 격차, 지역 격차, 실업, 부정부패와 범죄 그리고 민주화의 요구 또한 증대하고 있어 일어나고 있는 보완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만능주의와 평균주의의 空洞化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보이는 법륜공의 성장은 건전한 종교의 육성이 당대 중국의 또 다른 과제가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Ⅱ. 중국 삼자교회의 역사와 현실

1. 중국 삼자교회의 출현

중국선교는 근대선교의 역사와 일치한다. 근대선교는 일찍이 화란의 식민지 사업이 아시아로 미치면서 이미 17세기에 진전이 있었다. 그 후 18세기 초 할레선교회(1701), 모라비안 선교회(1732)가 조직되었고, 1792년 윌리암 캐리가 침례회 외방선교회를 조직하면서 영국의 해외선교가 본격화되었다. 18세기 초의 선교는 독일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으며 존 에슬리 등에 의한 영국의 복음주의가 벌전을 한 결과 세계선교에 중대한 동력이 되었다. 또 하나의 주요한 배경은 당시 영국의 사회경제적 상황이다. 영국은 당시 전 세계 무역망을 구축하고 최고의 식민지 권력을 추구하던 나라였다. 1708년에 동인도회사를 세웠고, 1715년에는 중국 광주에도 상관(商館)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근대 해외선교의 역사는 영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미국 등의 상선과 군함을 배제한 채 이해될 수 없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의 세계화 과정에서 “세계가 나의 교구”임을 표방한 감리교운동 등 영국 복음주의 신앙부흥운동의 결과, 국교회, 회중교회, 모라비안, 감리교, 장로교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초교파 런던선교회(1795)는 로버트 모리슨을 중국에 파송하여 중국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주요전략은 중국어 습득 외에, 성서번역, 문서선교, 순회 전도, 의료선교, 교육선교 등이었다. 중국이 공산화되기까지 142년동안 약 6,200여명의 서양선교사(특히 영국과 미국)가 중국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허드슨 테일러 유형을 따라 적지 않은 구령자를 얻었고, 티모시 리차드 유형을 따라 양무운동, 변법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불평등조약과 열강의 침략과정은 정확하게 기독교의 중국 내 발전과정과 일치하였다. 기독교는 그 최대의 수혜자였고, 때로는 협력자였다. 기독교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나선 민족주의 진영의 공적이 되었고, 교회와 기독교인은 십게 반기독교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중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민족종교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土着化(本色化)운동이다. 이미 19세기 중반에 헨리 벤, 앤더슨 등의 선교데스크가 근대선교운동에 대해 반성하면서 제창한 삼자운동(자치, 자양, 자전)이 있었고, 선교지의 폐해를 극복하고 현지화를 도모하기 위해 일어난 에큐메니칼 운동은 토착화를 구호로 삼았다. 민족적 색채의 기독교를 세우려는 노력은 자연 교회의 치리와, 경제주권, 신학적 반성의 문제까지 포함하면서, 삼자운동은 20세기 초 중국기독교의 주요 과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나타난 토착화운동의 열매는 아주 제한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교회의 치리만 현지인에게 맡기고 재정적, 신학적 책임은 계속 서방교회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해야 했고, 왕명도나 조자신 등의 신학사상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의 운명을 함께 고민하는 중국교회의 출현은 아직 없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민족해방, 인민해방의 시대정신을 고민하면서 투척하게 밀고나갈 기독교세력은 극히 제한되었다. 해방의 종소리는 오히려 공산당의 영도 아래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등장하였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는 인민의 적으로 분류되었고, 기독교는 통일전선의 대오 안에서 사상개조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험난한 해방운동과정에 동참하지 않았던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과거 선교사 시기의 기독교와는 다른, 중국기독교의 새로운 운명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오요종 등은 당과 정부의 적극적지지 아래 기독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다.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 인민이 명실상부하게 자치, 자양, 자전하는 인민의 교회를 건설코자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겨우 6억 인구 중 84만 명에 불과했고, 자발적인 교회갱신운동을 기다려줄 수 있는 사회분위기는 아니었다. 주은래 총리는 1950년에 이미 그 조급한 마음을 드러내고 있고, 이것은 당에서 주도하는 서명운동(약 42만 명이 서명)으로 발전하였다. 때마치 터진 한국전쟁 중에 美中 양국이 상호 재산동결 조처를 취하면서, 중국기독교의 보다 철저한 자기고백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은 控訴(고발)운동, 抗美援朝: 三自革新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의 결성으로 발전하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1954년 7월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기독교 전국회의를 통해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운동 위원회로 개칭되었다. 

2. 중국 삼자교회의 존재방식

중국기독교에 당과 정부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한다는 양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49년 직전 교회는 제국주의와의 연결 고리를 깨기 시작하게 되었고, 신앙을 사회적, 역사적으로 해석하여 중국교회로서의 토대를 쌓게 되었으며, 더구나 기독교인이었던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이 부패하고 붕괴해가는 정권임을 발견한 인민들과 함께 기독교인은 공산당의 높은 도덕성과 현실적 대안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으며, 이것은 공산당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불러 왔다.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영역뿐만 아니라, 언론, 민족, 출판, 집회, 결사 등 모든 사회 영역의 권리가 전면적으로 제한된다는 느낌은 일단 부차적인 것이었다. 

1949년 9월의 “인민정치 협상회의”에 참석한 개신교 대표는 오요종 등 토착교회(本色敎會)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이 삼자운동을 추진했다. 같은 해 12월에 중국 基督敎協進會(NCC)는 삼자원칙을 재확인하고, 서구선교단체로부터의 단절, 사회주의 사회에의 적응, 새로운 중국의 건설과 내적으로 일치된 예배의식(儀式), 조직, 생활윤리 등을 강구해 갔다. 서명운동의 일정한 성공은 1954년 삼자위원회가 정식으로 조직될 수 있는 지도력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교회는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신도수도 늘어났다. 

그러나 생산력 수준의 정체가 발견되던 1957년의 整風운동(反右派투쟁), 1958년의 大躍進운동이 시작되면서, 기독교는 한 번 더 개조를 요구받았다. 교회는 연합예배, 합병 등으로 서구의 잔재를 청산하고, 교역자는 노동과 학습을 통해 변화되어야 했다. 삼자의 지도자들도 제한된 활동만 허용되었다. 곧 이어서 교회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악몽의 시기가 엄습하였으니 곧 文化革命이다. 1966년부터는 종교단체뿐 아니라 종교사무처, 統戰部까지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제국주의의 도움 없이 스스로 견뎌내야 했던 ‘불의 단련’시기였다고 고백되어진다.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체험은, 소위 지하교회의 것만이 아니라, 모든 중국기독교인의 공통경험이 되었고, 신앙경험은 진정 중국현실에 녹아진 것이 되었다. 숫자적으로도 대폭 성장하는 기간이 되었는데, 훗날의 천안문사태 시기, 개혁개방 시기의 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기독교 급성장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자교회의 통계는 신중국 이후 50년 동안 84만에서 1,500만 명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니, 그이전 1942년의 84만 명과는 비교가 안되는 자력성장을 자랑할 만하다 할 것이다. 

1978년 당 11차 3중전회가 개최되면서, 문화혁명의 극좌파적 과오가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77년에 종교사무국의 업무가 재개되었고, 종교정책도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1979년 3월에 黨은 統戰사업과 종교사업에 대한 ‘投降主義’와 ‘修正主義’라는 죄명을 정식으로 씻어주었다. 三自會 회의가 열리면서 삼자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인정하고, 성경인쇄, 교역자 양성, 교회건설, 국제교류 등을 결의하였다. 이어 1980년의 제 3차 기독교 전국회의9남경)에서는 신중국 이후 삼자회가 성립되면서 중단되었던 중국기독교협회(CCC)의 사무를 재개하기로 하였다. 1981년, 1982년에는 각 성, 시, 현의 삼자회 支部가 속속 개재되었고, 기독교협회 지부도 확되되었다. 이로써 중국기독교는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 아래 전국의 기독교인들을 단결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과 독립, 자주, 자체 운영의 방침을 굳건히 지켜나간다”(三自會 규정 제 2조)는 三自會와, “전국 모든 교회와 신도의 사역을 위한 봉사를 제공하고, 신앙적으로 상호존중을 주장하고, 지체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사랑으로 서로 관용하고 평화롭게 서로 연락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되는 마음을 지키기를 노력한다”(基協 규정 제 3조)는 基協의 소위 兩會체제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물론 중국의 종교정책은 헌법 36조에서 규정하는 신앙과 불신앙의 자유, 그리고 국가교육제도의 독립, 외국세력의 불간섭, 사회질서와 공민 신체건강의 보호 등을 기초로 작성되며,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하기 위한 애국세력의 연대라는 관점에서, 국무원과 각 성급 단위의 종교사무국, 현, 시급의 종교관리부문이 관리한다. 이를 위해 1982년 <우리나라 사회주의 시기 종교문제에 관한 기본관점과 기본정책>(19호 문건)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중화인민공화국 경내 외국인 종교활동 관리규정>과 <종교활동장소 관리조례>, 1996년에 <중국기독교협회장정>과 <중국기독교 교회규정>, 2005년에 <종교사무조례> 등을 발표하였다. “공무원이 종교신앙 자유를 침해하면 2년 이하의 징역”(형법 147조)을 받게 되지만, 기독교회는 일단 삼자교회로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정책은 집회, 결사, 언론, 출판이 사회주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는 헌법의 제약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 

여하튼 모든 영역에 미치고 있는 중국헌법의 범위 안에서, 삼자회와 기협은 1986년의 제4차 전국회의(북경), 1991년의 제5차 전국회의(북경), 1996년의 제6차 전국회의(북경), 2004년의 제7차 전국회의(북경)을 공동 개최하였고, 성경인쇄, 찬양집, 설교집 등 문서출판, 신학교육, 교회건립, 해외교류 등을 전개하면서, ‘三好’를 이루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개혁개방정책의 열매이면서 동시에 비공인교회에 대한 제재와 해외의 종교침투에 대한 견제의 이유가 되고 있다. 신중국 초기 또는 문화혁명시기의 사회적 과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지하로 잠입한 교회단체는 다시 한 번 소위 초월적 순수신앙을 다짐하고 있고, 때로 외국 종교세력과의 연계로 인하여 黨政을 긴장하게 한다. 

                                           Ⅲ. 중국 삼자교회에 대한 평가와 과제

1. 중국 삼자교회의 선교적 자리매김

지난 100여 년 동안 중국의 종교관에 가장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진화론적 종교관 또는 맑스주의 종교관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종교가 사회적 산물이요 종속변수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애초 서구선교정책의 변화로 인하여 시작된 삼자교회론은 신중국 성립 이후 그와 같은 사회주의적 기독교의 교회론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교회와 사찰에 별다른 차별성이 없다. 그래서 종교간의 갈등은 최소화되고, 다만 어떻게 인민을 섬길 것인가만 문제가 된다. 이 때 기독교에 대해서는 그 역사적 배경 때문에 특히 외국세력과의 단절이 강조되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교회관은 종교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선정적인 교파경쟁이 중국에 유입되는 것을 방지하고, 삼자교회라는 단일 교단, 평신도중심의 교회를 발전시켰다. 신학연구는 국가연구기관이나 대학의 철학, 종교학 분야에서 이루어졌고, 지식인들은 종교생활을 문화적 취향으로 여기게 되었다. 

현대 종교학이 유력 종교 특히 기독교의 독선에 대해 어느 정도 윤리적 평가를 가하면서 발전한 것이라면, 선교학에서도 그와 같은 반성은 있어 왔다. 애초에 선교학은 선교방법론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서구선교가 문제로 드러나자 선교 자체에 대한 물음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개인의 회심이나 교회의 이식이 선교의 목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여기에서 나왔다. 특히 1954년 빌링겐대회 이후 ‘하나님의 선교’ 개념이 호응을 얻으면서, 이제 교회가 아니라 ‘세계’ 자체가 선교의 문제로 대두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세계 구원을 위한 도구로 새롭게 규정되었다. 또한 고난의 상황에 대한 심판(for others)이 아니라,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고난받는 이와 함께하는(with others) 선교가 요구되었다. 

중국 삼자교회는 분명 중국인이 민족유산을 고려하고, 나아가서 중국인이 스스로 치리하고 살림하는 교회의 건설을 목표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신중국 성립시기의 사회적 목표와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 여하튼 삼자교회는 인민과 함께하는 교회의 건설을 위해서, 대오를 통일하고 교권세력을 통제하며 외국세력의 침투를 경계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인이 한 명 줄어드는 것을 의미하는 회심자의 숫자적 증가나 사회적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교회의 성장은 전혀 무의미했다. 가장 중요한 선교적 과제는, 제반 사회세력과 함께 인민민주주의 국가의 건설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중국 이후 중국 삼자교회만의 독특한 신학적 발전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나중에 정광훈이 이 시기의 삼자교회가 얼핏 해방신학의 관심을 드러냈다고 평가한 바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신학적 정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오랜 침묵 끝에 재등장한 1980년대 삼자교회 신도들의 신앙색채는 여전히 복음주의적인 것이었다. ‘삼자신학의 건설’은 여전히 과제 형식으로 남아 있어서, 신학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상황은 변하여서, 중국 삼자교회는 이제 소외된 자들에 대한 치유 등의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고 있는데, 군중대회나 서명운동이 아니라, 복음주의적 실천을 통해서 접근된다. 그러므로 삼자신학은 복음주의적 전통과 에큐메니킬 선교신학의 유산에 대해서 아직 개방되어 있는 미완의 것이다. 

문제는 교회의 독립적인 자리를 어떻게 마련해 왔으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dlfWLr이 1920년대부터 서구선교사의 영향을 받은 또는 자생적인 독립교회들이 있었고, 신중국 성립 이후 군중운동에 쉽게 영합할 수 없었던 소위 양심세력들이 존재했다. 때로 그들을 향한 통제와 박해가 과장되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영역은 사회적 실천분야로 강요되었고, 때로 양심수를 낳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실천에 대한 적극적 참여도 여의치 않았다. 문화혁명기를 제외하면, 그나마 세계관의 자유가 허용되고, 신앙의 자유를 가지고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와 교육, 친교를 통해 선교하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 오늘날 중국 삼자교회의 선교적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삼자교회의 제한적인 신분이 기독교 성장의 결정적 장애가 되고 있다든지, 소위 지하교회의 적극성이 성장의 열매를 내는 주요 역량이라는 평가들에 대해서는 공감하기 어렵다 오히려 중국현대사의 아픔과 상처에서 중요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성령의 일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보다는, 개인과 세계를 관영하고 있는 죄악의 심각함과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이라고 하는 고유의 케리그마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복음의 근본 원리는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아울러서 세계에 대한 책임의 방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복음주의를 넘어서서, 전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선교목적은 여전히 상상력을 자극하고, 모든 선교세력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2. 중국 삼자교회의 과제

중국 교회의 미래는 삼자교회 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삼자교회는 150년 선교역사의 부정적인 부분을 포착하여 시작됨으로써 중국 인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공감대를 얻어냈다. 한국교회와 비교해 보았을 때, 오늘날 중국 삼자교회는 과거의 洋敎 이미지를 거의 씻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삼자교회는 중국현대사의 지상 과제였던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햐였고, 신중국 이후 거듭되었던 좌경 정치노선의 폐해를 인민들과 함께 경험하였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함RP 동참하고 있고, 그로 인한 아픔과 슬픔의 치유에도 참여하고 있다. 모든 중국교회의 성장과 인민들의 호감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해서 중국 삼자교회는 대단히 안정적이고 유연한 중국 사회주의 정권의 협력자로 자리를 잡았다. 사회주의 체제의 중국에서 공개적,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교회는 삼자교회이다. 따라서 인민들은 거리낌 없이 삼자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관심을 표현할 수 있고, 보다 다양한 신앙경험이나 프로그램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을 불편해 하지 않는다. 종교영역뿐 아니라 사회생활 모든 영역에서 인민들은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 있다. 예컨대 3시간 버스를 타고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한 불편함을 해소해 주기 위해 삼자교회는 聚會点(가정교회)를 세워 관리하며, 정부의 협조를 얻어 敎堂(교회)를 늘려간다. 이과정에서 중국의 모든 事業單位가 그러한 것처럼, 삼자교회는 黨政의 정치노선과 정책, 관리에 부응하고, 타협하고 때로는 활용한다. 그러므로 삼자교회의 지도자는 종종 종교사무국이나 공안국과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 

오늘날 그와 같은 제한된 여건 속에서 중국 삼자교회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각 지역마다 정부관리, 교역자, 신도의 성향 등 여건에 따라 발전 정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틀에 하나 꼴로 전국에 새로운 교회당이 세워지고 있고, 애덕인쇄소에 발행하는 성경은 5천 만부 이상이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신학교 또는 성경학교는 수십 곳에 이르고 있고, 고급인재의 신학교 지원이 늘어나고 있다. 교역자는 교회 형편에 따라 일반대학과 해외유학을 통한 계속교육에 참여할 수 있다. 도시교회에서는 매 주일마다 몇 차례씩의 주일예배를 소화하고 있고, 교우들은 거의 매일같이 집회에 참여할 수 있다. 물론 삼자교회 역시 여전히 농민, 여성, 문맹, 노인의 4多 교회이지만, 청년들이 많아지고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관리(주일학교)가 이루어지며, 기독교 미술과 음악이 발전한다. 기독교협회가 설치된 이후, 인쇄출판, 신앙교육, 친교봉사, 의례제정 등 목양분야가 거듭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삼자교회는 선교사나 정부, 인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철저하게 자력갱생하여 태어난 교회이다. 삼자교회가 정부의 혜택을 독차지했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모든 인간사에 정치적 행동이 없을 수 없겠고 삼자교회가 신중국의 정치노선을 선택했지만, 지역 삼자교회는 여전히 종교인으로서의 불이익과 피해를 r마수해야 하는 처지에서 순수한 신앙을 훈련하며 성장했다. 그러한 고민은 신앙을 무디게 하기도 하지만, 또 많은 경우에 정체성을 추구하게 하고 영적 깊이를 날카롭게 다듬었다. 때로 가정 중심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고, 평신도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따라서 삼자교회는 자랑스러운 중국교회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취약성이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먼저 일부 지하교회나 서방교회를 포함한 기독교 전통과 일정 정도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국교회의 역사적 정통성은 신중국 위가 아니라 기독교 역사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자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박해받은 이들을 살피지 못한 죄책의 고백(지하교회와의 화해)이 필요하고, 서방교회와도 중국 및 세계 선교를 위해 연대하고, 중국 기독교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 이것은 개혁개방의 진척과 맞물려서 진행될 것이지만, 보다 공고하면서도 보편성을 지니며 세계교회를 위해 기여하는 중국기독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밖에 비전을 세우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리더십이 부족하다. 현재 중국 기독교의 성장은 기독교 자체의 흡수력보다는 외적 요인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그러므로 이것을 진정한 발전으로 이어 갈 지도력이 필요하다. 만약 다른 것(예를 들면 여가산업, 사회복지, 공동체 활동 등)에 의해서 현재의 사회적 욕구가 충당되고 나면 교회성장은 정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전문화, 정보화, 다원화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지식인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적 비전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영성 훈련과 문화 창조 훈련, 신학 작업, 신학 교육 뿐만 아니라 평신도 교육, 민주적인 교회 운영, 활발한 재정 운용 등으로 가능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교회가 지식인이나 중산층을 흡수하고 있지 못하다. 

또한 열심히 선교하지 않는 추수적인 교회이다. 그 이유는 중국을 이미 해방된 사회(즉 선교가 필요하지 않은 사회)로 보는 정부의 관점을 돌파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회주의와 대결하는 자세보다 그 역사적 의미와 공헌을 이해하며 극복하려는 책임적인 자세이다. 그들은 법률과 교육과 언론, 검찰 모든 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신앙에 기초한 도덕적 우월성, 영원을 사모하는 이론적인 변증, 그리고 가장 중요한 신앙적인 헌신을 통해서 경쟁할 수 있다. 특히 개혁개방시대의 선교적 과제에 대한 거시적 안목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독립적 자리를 확보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것이 종교탄압, 인권탄압이라는 서방의 논리를 즉각적으로 적용하여 지하교회를 선택하는 외국선교사의 논리로 이용되어서는 곤란하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개인의 권리는 전 인민의 자유와 권리 신장을 위해 유보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고 정채적인 문제이다. 만약 이 문제 때문에 지하교회를 택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반정부 민주화 운동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중국교회 전체가 이 사회의 민주화 수준 안에서 독립적인 영역(힘)을 키워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나오는 말 - 한국교회와의 협력방안

지금까지 중구 삼자교회의 역사적 배경과 발전과정, 현재 정황을 차레로 살펴보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중국 삼자교회는 중국 현대사의 필연적인 산물이요, 그 功過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중국 개신교 단일교단이다. 삼자교회에 대한 질문은 중국사회에 대한 질문이요, 중국의 민간단체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다. 창의적인 리더십이나 선교적 통찰력, 세계교회와의 연대 등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삼자교회는 중국의 인민과 기독교인의 자부심을 갖는 현대사의 열매인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중국사회의 일반적인 발전단계를 따라 민간단체의 활동공간이 넓어지면서 삼자교회의 자치, 자양, 자전이 더 잘 수행될 것이고(三互), 선교적 요청이 높아져서 심리적 기능(긴장해소/박탈보상/소속감)도 강화될 것이며, 사회적 역할(사회통합/변형)도 커질 것이지만, 그만큼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삼자교회를 중국 정부의 부속기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분명히 한국교회 자신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극좌파의 과오를 일반화한다든가, 반공신앙이 전제되어 있다든가 하는 것이다. 여하튼 한국교회의 중국선교는 1980년대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기독교 신앙의 독립적 성격을 맹신하고 대체로 중국 삼자교회를 불신하면서 전개되었다.

필자가 파악하고 있는 바, 지난 20여년 동안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 유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교회지도자 교육: 대부분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광야신학교의 운영에 최종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청소년이나 아동주일학교를 위한 지도자 교육도 생겨났다. 

2) 전문인 선교: 병원, 학교, 농장, 양로원, 고아원, 장애인단체, 기타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전도, 평신도 전문인 양육, 기독교적 모범 제시를 목표한다. 기관을 수단으로만 이해하는 경우도 많다. 

3) 캠퍼스 선교: 유학생에 의한 전도와 양육, 평신도 및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한다. 

4) 문서 선교: 부족한 자료(문서/디스켓 등)의 보급과 출판기관의 건설, 

5) 교회 개척: 직접 교회를 개척하거나 선교단체를 설립, 

6) 교류 선교: 외국과의 경험 나눔, 교류를 통해 지도자 양육, 문서 보급, 교회 및 신학교 건설, 

7) 문화 선교: 극이나 노래, 문화사업 등 문화적인 방법으로 선교, 

8) 연구 선교: 학문적인 변증 작업에 참여 등. 

한편, 삼자교회와 한국교회와의 교류는 1991년과 1992년의 예비적 만남을 거쳐 1993년 한국 KNCC와 중국 CCC가 남경에서 제 1차 한중교회선교협의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은 그 후 네 차례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한국교회의 중국선교현실에 대한 CCC의 이견에 대해 KNCC가 별다른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KNCC 자체가 사실상 중국 선교를 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대변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 교착 상태에 빠져 있다. 그 후 CCC는 한국의 교단교회나 선교단체, 신학교를 직접 상대하고 있고, 한국교회 역시 전국 또는 지역 삼자교회와 직접 접촉하고 있다. 그러나 한중교회선교협의회는 상대방교회의 선교 주권을 인정하고 협력방안을 찾아왔기 때문에, 정세변화에 따라 교류협력의 가능성이 넓어질 것이며, 실제 지역에 따라 보다 융통성 있는 협력을 전개하는 모델이 제시되기도 한다.

공동의 것, 가능한 것, 긍정적인 것을 찾아 실질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는 정보와 자원과 사람의 교류를 활발히 진행하여야 한다. 먼저 정보의 교류를 위해서는 각급교회와 학교, 기독교 관련 봉사기관, 언론, 학술자료의 목록화 작업과 교환이 필요하다. 예컨대 수첩과 달력을 교환하여 서로 간에 일정을 확인하고 공동의 절기예배나 실천활동을 찾아나갈 수 있다. 중국의 <천풍>이나 <남경신학지>를 한국교회가 보고, 한국의 <교회와 세계>나 <기독교사상>을 중국교회가 구독할 수 있다. 양국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라면, 동아시아의 선교정보와 과제를 나눌 새로운 잡지의 발행도 생각할 수 있다. 예컨대 황사문제는 공동의 선교과제가 될 수 있다. 또 한국의 학자들이 중국의 화동신학원, 남경신학?ㄴ 등의 도서관을 활용하고, 중국의 신학교 교사나 학자들이 한국 신학교의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신학교류위원회를 둘 수 있다. 한국에서 복지사업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중국교회는 삼자교회 건설과정에서의 간증 경험을 나눌 수 있다. 이러한 각종 분야의 경험을 나눌 서적의 상호 출판을 위해 공동출판위원회를 설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동의 목양, 선교, 신학적 탐구의 자리도 필요하다.

양국의 선교를 위한 자료의 교환, 공동 연구의 진행과 함께, 자원의 나눔이 뒤따라야 한다. 일찍이 제 1차 한중교회협의회에서 선교가 공동의 과제이며 이를 위해 에큐메니칼 자원을 나누기로 합의하였다. 중국교회는 아주 오래 전에 세계교회의 선교 일선이었으며, 일치 운동에도 적극 참여한 바 있다. 중국 전역에는 그러한 역사적 자원이 아주 풍부하고, 젊은이들을 위한 좋은 교육 자료가 많다. 타종교나 비기독교인과의 대화를 위한 자료도 풍부하다. 유학이나 도교, 불교, 맑시즘 등은 특히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아주 긴요한 것이다. 한편 한국 기독교는 항일 시기나 냉전 시대, 경제 건설 시기의 경험, 그리고 교회의 성장,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 경험, 민중교회 경험 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오늘날 한국경제의 세계화 추세에 따라 선교범위를 국외로 확대하려는 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원을 활용하여 중국교회의 사회봉사활동, 신학교 건설, 외국인 목회, 교회건설(음악/미술/건축/예의 등), 에큐메니칼 교류협력에 기여할 수 있다. 중국교회는 한국교회를 지원하여 한국 내 중국인 목회에 책임을 나누어 가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자원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펼쳐가야 한다. 이미 목회자, 평신도, 여성, 청년, 학자, 학생, 사회 활동가 등의 인적 교류에 대하여 우리는 두 차례에 걸쳐 합의하였고, 실천한 사례도 있다. 그러나 그 양은 극히 적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려는 성실한 열정을 가지고 과거보다 더욱 충실하여야 한다. 예컨대 양국 교회의 청년 학생들이 함께 봉사활동을 하며 각국의 농촌을 이해하고, 아시아의 선교과제를 생각할 수 있다. 환경보호활동은 그 좋은 살예가 될 수 있다. 그 주요한 목적 중의 하나는 아시아 에큐메니칼 지도력을 양성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목회자나 신학교 교사의 교류를 통해서 선교협력을 강화시켜 나갈 수 있다. 서로의 경험과 자원을 배울 인턴제도를 둘 수 있고, 장학기금을 세울 수 있다. 예컨대 남경신학원과 한국의 모 신학교에서 교환 학생, 교환 교수 제도를 둘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각 신학교에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전문가가 극히 드문 현실로 볼 때, 신학이론의 서구 편향성은 시급히 교정되ㅏ어야 하며, 이를 위해 상호 격려가 요구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임을 고백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상황이지만 함께 연대하여 주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자매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더구나 아시아의 중심 교회로서 공동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기에 한중 양국 교회의 친교는 양국 교회뿐만 아니라, 아시아교회의 일치와 협력을 위해서도 창조적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중국과 북방선교지 소식
|
글쓴이 : 영혼의 사랑| 원글보기